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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まく危險 な香り

소립자

 

 

  같은 날 밤에 미셸은 샤르니 초등학교 시절에 찍은 사진 한 장을 다시 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사진 속의 아이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한 손에 교과서를 펼쳐 들고 있었다. 아이는 즐겁고 씩씩한 표정으로 카메라 쪽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오늘날의 그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감 넘치는 진지한 태도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무 두려움 없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 사회 속에 마련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의 시선에서 그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는 작은 깃이 달린 재킷을 입고 있었다.  p.26

 

                                                                                                                             사실 서구 사회에서 오랫동안 주류를 이뤄온 기독교적 인류학에서는 수태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온 생명을 한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육신 안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 영혼은 영원히 살아서 나중에 하느님과 결합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생물학이 발전함에 따라 유물론적 인류학이 서서히 부상하게 된다. 기독교적인 인류학과 비교할 때 전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 인류학은 윤리적인 면에서 한결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 유물론적 인류학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기독교적 인류학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유물론적 인류학에서는 태아를 무조건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점진적 분화 상태에 있는 세포들의 작은 집합체인 태아는 일정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하는 유전적 결함이 없는 경우, 부모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생명을 가진 독립된 개체로 인정된다. 다음으로, 유물론적 인류학에서는 노인을 지속적인 해체 상태에 있는 기관들의 결합체로 간주한다. 노인은 기관들이 서로 충분히 연계하면서 기능하고 있다는 조건에서만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권리를 진정으로 주장할 수 있다 -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된다. 이렇듯이 인생의 양쪽 끝에 있는 두 시기는 임신 중절이나 안락사와 같은 윤리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근본적으로 상반된 두 인류학은 계속 대립하게 된다.  p. 77

 

 

  먼 훗날 미셸 제르진스키는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일련의 작은 변이들이 그것을 예고하고 준비하고 촉진한다. 그 작은 변이들은 종종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에 출현했다가 사라진다. 나는 나 자신을 그런 작은 변이들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p.193

 

 

  어떤 사람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나 정말 중요한 화제를 회피하는 것이 서서히 버릇처럼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더 인간적이고 더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끝없이 뒤로 미루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인간관계도 좁고 고정된 틀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기대는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유지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결정적인 사건<대개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품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p. 288

 

 

  <자연에 나타나는 형상들은 인간이 지어내는 형상들이다. 삼각형이나 얽혀 있는 모양이나 나뭇가지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늠한다. 우리는 그것들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인간이 지어내고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는 창조물들 속에서 성장하다가 죽는다. 우리는 인간적인 공간 속에서 측량을 하고 그 측량을 통해 우리의 도구들 사이에 공간을 창조한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은 공간을 생각하면서 공포에 떤다. 그들은 공간을 거대하고 캄캄하고 텅 빈 것으로 상상한다. 그리고 존재를 이 공간 속에 고립된 채 웅크리고 있는 하나의 공 같은 형태로 상상한다. 3차원의 영원한 무게에 짓눌려 있는 하나의 형상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공간이라는 관념에 겁을 먹고 옹송그린다. 그들은 추위와 공포를 느낀다. 최선의 경우에는 공간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공간의 한복판에서 서로 슬프게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공간은 그들의 내면에 있고 그들 자신의 정신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그 공간 속에서 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운다. 그들의 정신이 지어내는 공간 속에서 분리와 거리와 고통이 생겨난다. 하지만 더 설명할 필요 없이 분명한 사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바다 건너 산 너머에서 자기 연인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는 바다 건너 산 너머에서 자기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사랑은 존재들을 결합시킨다.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한다. 선행은 존재와 존재를 묶어 주고 악행은 존재와 존재를 이간시킨다. 분리란 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분리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고 거대하고 상호적인 얽힘뿐이기 때문이다.>  p.324-325

 

 

 

 

 

소립자

미셸 우엘백 장편소설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